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역사적, 문화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왜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지 않았을까요? 이 글에서는 두 국가의 분리된 역사와 그 이유를 탐구합니다.
1. 중세부터 시작된 연합의 역사
1.1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의 두 국가의 역할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중세부터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정치적 연합체 내에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신성 로마 제국은 962년에 창설된 이후로 중앙 유럽의 많은 영토를 아우르는 광대한 연합체로, 오늘날의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여러 국가들이 그 일원으로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제국은 이름 그대로 로마의 권위와 신성성을 이어받아, 기독교 세계의 수호자 역할을 자처했습니다.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제국 내에서 정치적, 군사적 중심지 중 하나로 자리 잡았으며, 특히 합스부르크 가문이 15세기부터 제국의 황위를 독점하면서 그 중요성은 더욱 커졌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트리아를 기반으로 한 다민족 제국을 운영하며, 신성 로마 제국의 통합과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한편, 독일의 여러 공국들은 제국 내에서 다양하고 독립적인 위치를 유지하며,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특히 남독일의 바이에른, 작센과 같은 지역은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중요한 정치적, 경제적 중심지로 기능했습니다.
1.2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경쟁
17세기 후반부터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사이의 경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신성 로마 제국의 중심으로서, 제국 내의 주도권을 유지하고자 했지만, 18세기에 이르러 프로이센이 급격히 부상하면서 이 경쟁이 심화되었습니다. 프로이센은 특히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 프리드리히 2세(프리드리히 대왕)의 지도 아래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제국 내에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이러한 경쟁은 결국 신성 로마 제국의 정치적 분열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제국 내에서 전통적인 권위를 유지하고자 했지만, 프로이센의 부상과 군사적 성공은 이러한 오스트리아의 입지를 약화시켰습니다. 특히, 1740년에 시작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프로이센은 슐레지엔 지역을 강탈하며 오스트리아의 자존심에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이 전쟁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사이의 갈등을 더욱 고조시켰고, 결국 18세기 내내 두 국가 간의 군사적, 정치적 경쟁은 신성 로마 제국 내의 안정성을 해치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쟁은 결국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으며,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각각 독립적인 강대국으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신성 로마 제국이 1806년에 공식적으로 해체되면서, 독일 지역 내에서의 권력 구조는 크게 변화하였고, 이는 이후 독일 통일 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2.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갈등
2.1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의 영향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간의 갈등은 18세기에 이르러 극적으로 표면화되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과 7년 전쟁(1756-1763)이 있었습니다. 이 두 전쟁은 유럽 정치 지형을 바꾸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관계에 깊은 갈등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가 후계자로 지명한 딸 마리아 테레지아의 즉위를 둘러싸고 벌어진 전쟁입니다. 카를 6세가 후계 없이 사망하자, 프랑스, 스페인, 바이에른, 그리고 프로이센 등이 오스트리아의 왕위를 둘러싸고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이 가운데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슐레지엔 지역을 점령하며 전쟁의 중심에 섰습니다. 슐레지엔은 풍부한 자원을 가진 전략적 요충지로, 이 지역을 장악한 프로이센은 군사적, 경제적으로 큰 이득을 얻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슐레지엔을 되찾기 위해 끈질기게 저항했지만, 결국 1748년 엑스라샤펠 조약으로 전쟁이 종결되었고, 슐레지엔은 프로이센의 영토로 공식적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의 국력은 큰 타격을 입었으며,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간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7년 전쟁은 이러한 갈등을 더욱 심화시킨 사건이었습니다. 1756년에 시작된 이 전쟁에서 오스트리아는 프랑스, 러시아 등과 동맹을 맺고 프로이센에 대항했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여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었습니다. 프로이센은 인구와 자원에서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연이어 승리하며 슐레지엔을 끝내 지켜냈습니다.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는 또 한 번의 패배를 겪으며 패권을 크게 약화시켰습니다.
2.2 프로이센의 부상과 오스트리아의 패권 약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은 프로이센의 급격한 부상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프로이센은 프리드리히 2세의 지도 아래 강력한 군사력을 구축하고, 효율적인 행정 시스템을 도입하여 유럽의 주요 강국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와의 갈등을 통해 유럽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강화하고, 독일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반면, 오스트리아는 이 두 전쟁에서의 연이은 패배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의 주도권을 점차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통적인 세력 기반을 유지하려 했으나, 프로이센의 부상으로 인해 제국 내에서의 패권은 점차 약화되었습니다. 특히, 프로이센의 군사적 성공은 오스트리아의 정치적 위상을 흔들었고, 이는 결국 신성 로마 제국 내의 다른 독일 국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오스트리아의 지배력에 대한 회의감을 증폭시켰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19세기 독일 통일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오스트리아는 독일 연방 내에서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지만, 프로이센의 영향력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독일 통일 과정에서 배제되었고,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독일 제국이 탄생하게 됩니다.
3. 나폴레옹 전쟁과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
3.1 나폴레옹 전쟁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분리에 미친 영향
나폴레옹 전쟁은 유럽 전역에 걸친 광범위한 갈등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역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전쟁은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를 촉발시켰으며,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분리된 역사적 길을 더욱 명확하게 구분짓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의 강력한 지도자로 부상하며 유럽 전역을 장악하고자 했습니다. 1805년,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연합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이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독일 지역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라인 동맹을 결성했고,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해 있던 수많은 독일 공국들이 이 동맹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은 더 이상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고, 결국 1806년, 마지막 황제 프란츠 2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를 선언하게 됩니다. 천 년 이상 지속되었던 제국이 해체됨으로써, 독일 지역은 정치적으로 분열되었으며, 오스트리아는 독일 지역에서의 전통적인 패권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은 오스트리아가 독일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을 잃고, 프로이센을 비롯한 다른 독일 국가들이 점차 독립적인 길을 걷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3.2 빈 회의와 독일 연방의 수립
나폴레옹의 패배 이후, 유럽의 정치적 질서를 재정비하기 위해 1814년부터 1815년까지 빈 회의가 개최되었습니다. 이 회의는 유럽 각국이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영토와 정치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유럽 질서를 수립하기 위해 모인 자리였습니다. 빈 회의에서는 나폴레옹 전쟁 이전의 왕조 질서를 복구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고, 오스트리아는 다시 유럽의 주요 강국으로서 역할을 회복하려 했습니다.
빈 회의에서 논의된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독일 지역의 재구성이었습니다.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된 이후 독일 지역은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했으며, 여러 독일 국가들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고 있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빈 회의에서는 새로운 독일 연합체인 "독일 연방"(Deutscher Bund)을 수립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독일 연방은 39개의 독립된 독일 국가들로 구성된 느슨한 연합체로, 오스트리아가 연방을 주도하며 정치적 중심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나 이 연방은 강력한 중앙 통치 기구를 갖추지 못했으며,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간의 경쟁이 여전히 지속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독일 연방 내에서 자신의 전통적인 권위를 유지하려 했으나, 프로이센은 점차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며 독일 통일의 주도권을 잡으려 했습니다.
빈 회의에서 수립된 독일 연방은 독일 지역의 정치적 안정을 일정 부분 회복시키는 데 기여했지만,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간의 갈등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독일 연방은 독일 통일의 과정에서 프로이센의 주도로 해체되었으며, 이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분리된 역사적 길을 더욱 확고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4. 19세기 독일 통일 운동
4.1 프랑크푸르트 국민 의회의 대독일주의와 소독일주의
19세기 중반, 독일 지역에서는 민족주의와 자유주의의 물결이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이 운동은 특히 1848년 유럽 전역을 휩쓴 혁명의 영향을 받아 촉발되었으며, 독일 국민들 사이에서 통일된 독일 국가를 세우려는 열망이 고조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독일 내 여러 자유주의 세력은 프랑크푸르트에서 국민 의회를 소집하여 독일 통일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랑크푸르트 국민 의회(Frankfurter Nationalversammlung)는 1848년 5월에 독일 각국의 대표들이 모여 설립되었습니다. 이 의회는 독일 통일 방안을 논의하고,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여 독일을 통합된 국가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통일 방안을 둘러싸고 의회 내부에서는 두 가지 상반된 주장이 대립했습니다. 바로 대독일주의(Großdeutsche Lösung)와 소독일주의(Kleindeutsche Lösung)입니다.
대독일주의는 모든 독일어권 국가들을 통합하여 하나의 큰 독일을 만들자는 입장이었습니다. 이 입장에서는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모든 독일어권 영토를 하나의 통일된 국가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다민족 제국이었기 때문에, 독일어권 지역뿐만 아니라 비독일어권 지역들도 포함되었으며, 이로 인해 대독일주의는 실현 가능성에 있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반면, 소독일주의는 오스트리아를 배제한 나머지 독일어권 국가들만을 통합하자는 입장이었습니다. 이 방안은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통일안을 바탕으로 하며, 오스트리아의 복잡한 다민족 구조에서 오는 문제를 피하고, 보다 실질적이고 효율적인 독일 통일을 목표로 했습니다. 소독일주의는 프랑크푸르트 국민 의회에서 최종적으로 채택되었고, 프로이센 국왕에게 독일 황제로서의 왕관을 제안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의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국민 의회가 제안한 왕관을 거부했습니다. 이는 프랑크푸르트 국민 의회의 권위를 크게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고, 결국 의회는 1849년에 해산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의 논의는 독일 통일 문제에 있어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으며, 이후 프로이센 주도로 진행된 통일 과정에서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4.2 프로이센의 주도로 진행된 독일 통일 과정
프랑크푸르트 국민 의회의 실패 이후, 독일 통일 문제는 잠시 동안 중단되는 듯 보였으나, 1860년대에 들어서면서 다시금 활기를 띠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프로이센의 수상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였습니다. 비스마르크는 "철혈 정책"으로 불리는 강력한 외교와 군사 전략을 통해 독일 통일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비스마르크의 첫 번째 목표는 오스트리아를 독일 통일 과정에서 배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1864년 덴마크와의 전쟁에서 오스트리아와 함께 승리하여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지역을 얻었으나, 이를 오스트리아와의 갈등의 씨앗으로 활용했습니다. 이후 1866년,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였고, 이를 **7주 전쟁(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이라고 합니다. 이 전쟁에서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승리하였고, 독일 연방은 해체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독일 내에서의 패권을 상실하고, 독일 통일 과정에서 배제되었습니다.
비스마르크는 곧바로 북독일 연방(Norddeutscher Bund)을 결성하여 독일 북부 지역의 국가들을 통합했습니다. 이 연방은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군사적, 정치적 연합체로, 이후 독일 통일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남독일의 독일 국가들은 여전히 독립적인 위치를 유지했으나,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와의 갈등을 이용하여 이들을 통합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 결과,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발발하였고, 이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하면서 남독일 국가들은 프로이센 주도의 통일에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1871년 1월 18일,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German Empire)이 선포되었고,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가 독일 황제로 즉위하면서 독일 통일은 완성되었습니다.
이로써 독일은 하나의 통일된 국가로서 유럽의 중심 강국으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오스트리아는 독일 국가들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별개의 국가로 남게 되었습니다. 프로이센의 주도로 이루어진 독일 통일 과정은 독일의 근대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후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분리된 역사적 길을 더욱 명확히 구분짓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5. 비스마르크와 프로이센의 승리
5.1 7주 전쟁과 독일 연방의 해체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수상으로서 독일 통일을 추진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전략 중 하나는 독일 내에서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통일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이 전략의 중요한 단계는 1866년에 발발한 7주 전쟁(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이었습니다.
7주 전쟁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간의 긴장된 관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전쟁의 발단은 덴마크와의 전쟁 후에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문제를 둘러싼 갈등에서 비롯되었지만, 이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독일 내에서의 패권을 둘러싼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오랜 경쟁이었습니다. 비스마르크는 이 전쟁을 통해 독일 연방을 해체하고, 독일 통일의 주도권을 프로이센이 장악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쟁은 1866년 6월에 시작되어 단 7주 만에 프로이센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났습니다. 프로이센군은 최신식 무기와 철도 시스템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오스트리아군을 압도했으며, 전쟁 내내 우위를 점했습니다. 이 전쟁에서의 승리는 프로이센이 독일 내에서 오스트리아를 배제하고 독일 국가들의 통일을 주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전쟁의 결과로 프라하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이 조약에 따라 독일 연방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독일 내에서의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하고, 독일 통일 과정에서 배제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또한 베네치아를 이탈리아에 넘겨주어야 했으며,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 제국의 위상은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5.2 북독일 연방의 창설과 독일 통일의 완성
7주 전쟁 이후, 비스마르크는 독일 북부의 국가들을 중심으로 북독일 연방(Norddeutscher Bund)을 창설했습니다. 1867년에 설립된 이 연방은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정치적, 군사적 연합체로서, 독일 북부의 22개 국가를 하나로 묶었습니다. 북독일 연방은 독일 통일을 위한 중요한 기틀을 마련했으며, 프로이센의 강력한 군사력과 외교력이 결합된 연방이었습니다.
비스마르크는 북독일 연방의 창설을 통해 독일 통일을 점진적으로 추진하였으며, 남독일의 독립적인 독일 국가들에 대해서도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남독일의 국가들은 여전히 오스트리아와의 역사적 연대감과 독립적인 입장을 유지하려 했기 때문에, 비스마르크는 이들을 프로이센 주도의 통일에 끌어들이기 위해 외교적, 군사적 압력을 가했습니다.
비스마르크의 통일 전략에서 결정적인 마지막 단계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1871)이었습니다. 이 전쟁은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의 도발로 시작되었지만, 비스마르크는 이 전쟁을 독일 통일을 완성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프로이센은 이 전쟁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프랑스는 대패하여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의 수립을 선포하게 됩니다.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가 독일 황제로 즉위하면서 독일 제국(German Empire)이 공식적으로 탄생했습니다. 이로써 독일은 하나의 통일된 국가로서 유럽의 주요 강국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독일 통일은 프로이센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비스마르크의 철저한 외교적, 군사적 전략의 산물이었습니다.
독일 통일의 완성으로 독일 지역 내에서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은 완전히 사라졌으며, 오스트리아는 독일 국가들로부터 분리된 별개의 국가로 남게 되었습니다. 비스마르크와 프로이센의 승리는 독일의 정치적 지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으며, 이후 유럽의 역사를 새롭게 쓰게 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6.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현대적 관계
6.1 제1차,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오스트리아 관계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관계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극적으로 변화했습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은 두 국가의 운명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붕괴하였고, 오스트리아는 독일어권 국가로서 독일과의 통합을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919년 베르사유 조약과 생제르맹 조약에서 연합국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통합을 금지했습니다. 이 조약들은 오스트리아가 독일과 정치적, 경제적으로 통합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독일과의 합병을 희망하는 국민들이 많았으나, 국제적인 압력으로 인해 독립된 소규모 공화국으로 남아야 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관계는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1938년,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는 "안슐루스(Anschluss)"를 강행했습니다. 이 병합은 독일어를 사용하는 두 국가의 재통합을 의미했지만, 이는 오스트리아의 자주성과 독립을 박탈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나치 독일의 일부로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하게 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 독일과 함께 패전국으로서의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전쟁 후, 오스트리아는 다시 독립국으로 재건되었으며, 1955년 오스트리아 국가 조약을 통해 오스트리아는 영구 중립국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했습니다. 이 조약에서는 오스트리아가 독일과 정치적으로 연합하지 않겠다는 조건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별개의 국가로서 각각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6.2 유럽 연합 내에서의 현재의 관계와 통합 수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관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 기간 동안에는 다소 제한적이었으나,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유럽 통합의 일환으로 점차 가까워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오스트리아는 1995년에 유럽 연합(EU)에 가입하면서, 독일과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습니다.
유럽 연합 내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습니다. 두 나라는 모두 독일어를 사용하는 국가로서, 유사한 문화적 배경과 경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양국은 유로존에 속해 있어 동일한 통화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는 경제적 통합의 수준을 더욱 강화하는 요소로 작용합니다. 유럽 연합의 단일 시장과 열린 국경 정책 덕분에,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자유로운 무역과 인적 교류를 누리고 있습니다.
특히, 양국은 유럽 연합 내에서의 공동의 정치적 목표를 공유하며, 다양한 국제적인 이슈에 대해 협력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환경 보호, 에너지 정책, 난민 문제 등과 같은 주요 유럽 이슈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자주 협력하며, 유럽의 정책 결정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두 나라는 문화적으로도 강력한 유대감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공통된 역사적 유산과 언어를 공유하며, 양국 국민들은 서로를 매우 가깝게 느끼고 있습니다. 이는 교육, 예술, 관광 등의 분야에서도 나타나며, 독일과 오스트리아 간의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게시판 > 역사정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쿠빌라이 칸 대월 원정 실패한 남방 정벌의 비밀 (2) | 2024.10.17 |
---|